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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_Prologue 삼국지■― 난세의 지혜, 사람의 길 ―□《삼국지》는 단순한 고대 전쟁 서사가 아니다.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세와 신념, 그리고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 담긴 인간의 기록이다. 이 작품은 18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동양의 정신을 지탱한 지혜의 보고이자,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의 연금술이다.문학평론가로서 나는, 난세를 건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랜 시간 탐독해 왔다. 정치가든, 예술가든, 평범한 시민이든 시대의 격랑 앞에서 우리는 항상 길을 잃는다. 이때 삼국지를 펼치면, 길 위에서 묵묵히 발자국을 남긴 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유비는 의리로, 조조는 결단으로, 제갈량은 지혜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다. 그들의 삶은 곧 사람의 길이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길잡이가 된다.이 연재는 복잡한 .. 2025. 5. 31.
에필로그_Epilogue 다정한 삶, 오래된 말들한 걸음씩 걸었다.스승은 앞서 걷고, 달삼은 곁을 따라가며 묻고, 배웠다.그 길 위엔 거창한 철학이나 현학의 말보다, 검정고무신 한 켤레, 논두렁 위에 핀 민들레, 한 모금 막걸리와 한 조각 누룽지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삶은 어디서나 말을 걸어오고 있었고,스승은 그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었으며,달삼은 그 말에 가슴으로 대답하는 사람이었다.50편의 이야기 속에 등장한 낱말들은모두 우리가 스쳐 지나쳤던 일상의 것이었다.하지만 스승과 달삼의 대화를 통해 그것들은 다시 생명을 얻고,한 줄기 빛이 되어 독자의 마음에 스며들었다.낡은 나무의자도, 오일장도, 멍석도, 종이비행기도—결국은 모두 '사람'을 품은 말이었다.이야기 하나하나마다 담긴 것은그 시절의 냄새, 마음의 자세, 그리고 .. 2025. 5. 31.
지게 지게지게는 어깨 위에 얹는 짐이다.곡식도, 나무도, 때로는 가족의 생계까지도 그 위에 실렸다.나무틀 하나에 짐을 고르고, 무게를 나누며 사람은 묵묵히 걸었다.지게는 단순한 노동의 상징이 아니다.그건 책임이고, 견딤이며, 나눔이다.그래서 지게를 진다는 건 단순히 무거움을 떠안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등을 내어주는 일이다.■□산자락 초입, 스승과 달삼은 낡은 지게 하나를 마주했다.달삼은 손으로 나무 틀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스승님, 이 지게는 참 조용한데도 묵직한 말이 들리는 것 같아요.”스승은 무릎을 굽혀 지게를 들어보며 말했다.“지게는 말이 없지. 하지만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물건이기도 해. 저마다 다른 짐을 실었고, 그 무게만큼 살아낸 흔적이 있으니까.”달삼은 지게를 지고 일어나보려다 멈.. 2025. 5. 31.
트랜지스터 라디오 트랜지스터 라디오트랜지스터 라디오는 작지만, 그 안엔 온 세상이 들어 있었다.먼 고장의 소식, 누구의 사연, 누군가의 노래까지 조용한 골방에 흘러들었다.귀를 가까이 대고 볼륨을 조절하던 그 손끝엔 설렘이 있었다.세상을 먼저 보지 않아도, 듣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시간.트랜지스터 라디오는 고요한 공간에 온기를 전해준 다정한 동행이었다.■□늦은 저녁, 창문을 닫고 스승은 낡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꺼냈다.달삼은 놀라며 말했다.“이게 아직도 작동돼요? 정말 오래됐네요.”스승은 미소 지으며 전원을 켰다.지지직 소리와 함께 작은 볼륨으로 음악이 흘러나왔다.낡은 톤의 성우 목소리가 이어졌다.“지금 이 방송을 듣고 계신 분이 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달삼은 잠시 말을 잊고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스승님,.. 2025. 5. 31.
멍석 멍석멍석은 펼쳐놓으면 자리가 된다.들판이든 마당이든, 그 위에 앉으면 어느새 다정한 공간이 된다.사람을 눕히고, 곡식을 널고, 아이들을 뛰놀게도 하는 멍석은 자리이자 품이다.멍석 하나면 누구든 함께할 수 있었다.그래서 멍석은 환대의 상징이다.초대하지 않아도 받아들이는 마음, 그 따뜻한 허심을 멍석은 늘 펼쳐 보였다.■□가을 볕이 마당을 환하게 비추던 날, 스승은 멍석을 펼쳤다.달삼은 조심스레 그 위에 앉으며 말했다.“스승님, 어릴 땐 멍석 하나면 놀이터였죠. 굴렀다 앉았다, 손에 콩 껍질도 묻혀보고…”스승은 한쪽 구석에 앉아 끈을 손질하며 말했다.“멍석은 자리를 만드는 물건이지. 그 위에선 누구든 앉을 수 있고, 함께 나눌 수 있어.”달삼은 가만히 멍석 위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요즘은 어쩐지 자리를 차.. 2025. 5. 31.
논두렁 논두렁논두렁은 논과 논 사이, 물과 땅 사이를 잇는 좁은 길이다.때론 그 위로 농부의 발걸음이 지나고, 아이들의 맨발이 흙을 적신다.논두렁은 작지만 끊어지면 안 되는 선이다.그 경계 위에서 우리는 자연과 가까워지고, 삶의 뿌리를 확인한다.논두렁을 걷는다는 건 단지 흙길을 걷는 게 아니라, 생명과 손잡고 걷는다는 의미다.■□들판의 바람이 부드럽게 지나가던 어느 날, 두 사람은 논두렁 위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달삼은 조심조심 발을 디디며 말했다.“스승님, 이 길은 어릴 때 맨발로 뛰어다녔던 기억이 나요. 미끄러지기도 많이 했고요.”스승은 길가에 핀 민들레를 바라보며 말했다.“논두렁은 작지만 많은 걸 품고 있지. 논을 나누고, 물길을 이으며, 사람을 다니게 하니까.”달삼은 물가에 앉아 물고기 몇 마리를 구경하.. 2025. 5.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