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불
등잔불등잔불은 세상을 밝히는 불빛이 아니다. 오직 방 하나, 사람 하나만을 위한 작고 조용한 빛이다. 그러나 그 작은 불빛 하나가 책장을 넘기고, 마음을 밝히고, 하루를 마무리하게 한다. 등잔불은 말하듯 흔들리며, 가르치듯 오래 머문다. 크지 않아도 충분하고, 느리지 않아도 깊다. 삶에도 그런 불빛 하나, 곁에 있으면 외롭지 않다.■□밤이 깊어질 무렵, 스승과 달삼은 방 안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전깃불은 끄고, 오래된 등잔 하나에 불을 붙였다.달삼은 유리등 안에서 흔들리는 불빛을 바라보며 말했다.“스승님, 참 오래된 빛이에요. 전등보다 훨씬 작고 흔들리지만, 어쩐지 마음은 더 편안해져요.”스승은 불빛 너머로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등잔불은 사람을 기다리는 불이야. 서두르지 않고, 눈부시지도 않고. 다만 ..
2025. 4. 14.
검정고무신
검정고무신검정고무신은 유행도, 이름도 없이 아이들의 발에 묵묵히 붙어 다녔다. 흙길을 달리고, 개울을 건너고, 때론 벗겨져도 좋았다. 낡고 투박했지만 자유롭고, 무엇보다 튼튼했다. 그래서 검정고무신은 단순한 신발이 아니었다. 그건 한 시대를 견딘 발의 기억이자, 가난하지만 웃을 수 있었던 날들의 상징이었다. 닳아도, 늘 함께였던 그것.■□햇살 따가운 날, 달삼은 마을 헌 물건 가게 앞에서 오래된 검정고무신 한 켤레를 발견했다.먼지가 잔뜩 쌓인 신발을 들고 그는 스승을 불렀다.“스승님, 이거 보세요. 어릴 적 진짜 이 신만 신었잖아요.”스승은 손바닥으로 고무신을 털며 말했다.“검정고무신… 참 고단한 아이들의 발을 다 견뎌준 신발이지. 비 오는 날에도, 눈 오는 날에도, 학교도, 논두렁도 다 같이 다녔으니까..
2025. 4. 14.
5일장
5일장오일장은 다섯 날마다 되살아나는 삶의 무대다. 어디선가 트럭이 들어서고, 좌판이 펼쳐지고, 사람과 물건과 말소리가 장을 채운다. 팔고, 사고, 부르고, 깎고—삶의 가장 구체적인 에너지가 그 안에 있다. 오일장은 장날 하루만 살아도 충분한 풍경이다. 어쩌면 인생도 이와 같다. 다섯 날 준비해 하루 피어나는 것. 그러니 사는 건, 장날처럼 준비하고 기다리는 일이다.■□달삼은 시골 장터 어귀에 멈춰 섰다.“스승님, 장이 섰네요. 오일장… 참 오랜만이에요.”스승은 손등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말했다.“그래, 장은 늘 그 자리에 없으면서도, 정해진 날이면 정확히 돌아오지. 그게 오일장의 신기한 점이지.”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활기가 몰려왔다.장수들의 고함, 지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어딘가선 막걸리 한 잔 ..
2025. 4.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