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85

등잔불 등잔불등잔불은 세상을 밝히는 불빛이 아니다. 오직 방 하나, 사람 하나만을 위한 작고 조용한 빛이다. 그러나 그 작은 불빛 하나가 책장을 넘기고, 마음을 밝히고, 하루를 마무리하게 한다. 등잔불은 말하듯 흔들리며, 가르치듯 오래 머문다. 크지 않아도 충분하고, 느리지 않아도 깊다. 삶에도 그런 불빛 하나, 곁에 있으면 외롭지 않다.■□밤이 깊어질 무렵, 스승과 달삼은 방 안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전깃불은 끄고, 오래된 등잔 하나에 불을 붙였다.달삼은 유리등 안에서 흔들리는 불빛을 바라보며 말했다.“스승님, 참 오래된 빛이에요. 전등보다 훨씬 작고 흔들리지만, 어쩐지 마음은 더 편안해져요.”스승은 불빛 너머로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등잔불은 사람을 기다리는 불이야. 서두르지 않고, 눈부시지도 않고. 다만 .. 2025. 4. 14.
검정고무신 검정고무신검정고무신은 유행도, 이름도 없이 아이들의 발에 묵묵히 붙어 다녔다. 흙길을 달리고, 개울을 건너고, 때론 벗겨져도 좋았다. 낡고 투박했지만 자유롭고, 무엇보다 튼튼했다. 그래서 검정고무신은 단순한 신발이 아니었다. 그건 한 시대를 견딘 발의 기억이자, 가난하지만 웃을 수 있었던 날들의 상징이었다. 닳아도, 늘 함께였던 그것.■□햇살 따가운 날, 달삼은 마을 헌 물건 가게 앞에서 오래된 검정고무신 한 켤레를 발견했다.먼지가 잔뜩 쌓인 신발을 들고 그는 스승을 불렀다.“스승님, 이거 보세요. 어릴 적 진짜 이 신만 신었잖아요.”스승은 손바닥으로 고무신을 털며 말했다.“검정고무신… 참 고단한 아이들의 발을 다 견뎌준 신발이지. 비 오는 날에도, 눈 오는 날에도, 학교도, 논두렁도 다 같이 다녔으니까.. 2025. 4. 14.
감나무 감나무감나무는 말이 없다. 봄엔 꽃을, 여름엔 그늘을, 가을엔 감을 내어주며 조용히 제 할 일을 한다. 제때 물들고, 제때 익어가는 그 품성은 사람보다 나무가 먼저 철을 안다는 걸 느끼게 한다. 감나무는 바람을 탓하지 않고 햇살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그저 기다림과 절제 속에서 가장 단단한 단맛을 키운다. 그래서 감은, 천천히 익을수록 더 깊고 달다.■□가을 햇살 아래, 달삼은 오래된 감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주황빛 감들이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달삼은 감 하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스승님, 감나무는 정말 신기해요. 조용히 서 있기만 하는데… 어느새 감이 이렇게 익었어요.”스승은 가지를 손으로 가볍게 쓸며 말했다.“말없이 다 내어주는 게 감나무지. 바라는 것도 없고, 꾸미는 것도 없이, 그저 철마다 .. 2025. 4. 14.
5일장 5일장오일장은 다섯 날마다 되살아나는 삶의 무대다. 어디선가 트럭이 들어서고, 좌판이 펼쳐지고, 사람과 물건과 말소리가 장을 채운다. 팔고, 사고, 부르고, 깎고—삶의 가장 구체적인 에너지가 그 안에 있다. 오일장은 장날 하루만 살아도 충분한 풍경이다. 어쩌면 인생도 이와 같다. 다섯 날 준비해 하루 피어나는 것. 그러니 사는 건, 장날처럼 준비하고 기다리는 일이다.■□달삼은 시골 장터 어귀에 멈춰 섰다.“스승님, 장이 섰네요. 오일장… 참 오랜만이에요.”스승은 손등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말했다.“그래, 장은 늘 그 자리에 없으면서도, 정해진 날이면 정확히 돌아오지. 그게 오일장의 신기한 점이지.”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활기가 몰려왔다.장수들의 고함, 지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어딘가선 막걸리 한 잔 .. 2025. 4. 14.
종이비행기 종이비행기종이비행기는 아주 가벼운 꿈이다. 어른 손엔 장난이지만, 아이 손에선 희망이 된다. 접고, 또 접어 마음을 실어 날리는 일. 날아가다 추락해도 괜찮다. 다시 접으면 되니까. 종이비행기는 멀리 가는 것보다, 마음이 담겼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모두 종이비행기처럼, 누군가에게 날아가고 싶은 존재다.■□맑은 오후, 언덕 너머 공터에서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있었다.달삼은 하얀 종이를 반듯하게 접으며 말했다.“스승님, 어릴 적 학교 끝나고 제일 좋아했던 게 종이비행기였어요. 친구들보다 더 멀리 날리려고 매일 연구했죠.”스승은 달삼 옆에 앉아 또 다른 종이를 접기 시작했다.“그땐 뭐든 진지했지. 한 장의 종이로 하늘을 나는 법을 배웠고, 떨어져도 다시 날릴 수 있다는 것도 알았어.”.. 2025. 4. 14.
빈대떡 빈대떡빈대떡은 특별한 날만 먹던 음식이었다. 비 오는 날이면 더 자주 생각나는 그 고소한 맛. 콩을 갈고, 부추와 김치를 넣어 지글지글 부쳐지는 소리는 마치 마음을 굽는 소리 같았다. 바삭한 겉과 촉촉한 속, 기름 냄새에 묻어나는 어머니 손맛까지. 빈대떡은 단순한 부침이 아니라, 정과 기다림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추억의 조각이다.■□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스승과 달삼은 마을 어귀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섰다.기름 냄새 가득한 공간에서, 빈대떡이 부쳐지는 소리가 정겹게 퍼지고 있었다.달삼은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스승님, 이 냄새 참 오래된 기억 같아요. 어릴 적 외할머니 댁에서 비 오는 날 꼭 이걸 부쳐주셨어요.”스승은 기름이 튀는 팬을 바라보며 말했다.“그 시절엔 빈대떡이 귀했지. 명절이나 큰 장날 .. 2025. 4.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