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의 온도와 삶의 결/스승과 제자의 대화 - 실체의 추상화

논두렁

by cheonglam 2025. 5. 31.
논두렁

논두렁



논두렁은 논과 논 사이, 물과 땅 사이를 잇는 좁은 길이다.
때론 그 위로 농부의 발걸음이 지나고, 아이들의 맨발이 흙을 적신다.
논두렁은 작지만 끊어지면 안 되는 선이다.
그 경계 위에서 우리는 자연과 가까워지고, 삶의 뿌리를 확인한다.
논두렁을 걷는다는 건 단지 흙길을 걷는 게 아니라, 생명과 손잡고 걷는다는 의미다.


■□

들판의 바람이 부드럽게 지나가던 어느 날, 두 사람은 논두렁 위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달삼은 조심조심 발을 디디며 말했다.

“스승님, 이 길은 어릴 때 맨발로 뛰어다녔던 기억이 나요. 미끄러지기도 많이 했고요.”

스승은 길가에 핀 민들레를 바라보며 말했다.

“논두렁은 작지만 많은 걸 품고 있지. 논을 나누고, 물길을 이으며, 사람을 다니게 하니까.”

달삼은 물가에 앉아 물고기 몇 마리를 구경하며 말했다.

“이 길 하나가 없으면 농사도, 논도 다 불편해지겠죠?”

“그래. 작아 보여도 논두렁은 생명의 경계선이야. 흙이 무너지지 않게 잡아주고, 발이 닿는 길을 만들어주지.”

달삼은 한참을 걷다 멈춰 서며 말했다.

“스승님, 논두렁은 늘 똑같은 길인데도, 계절마다 풍경이 다르네요. 봄엔 모심기, 여름엔 파랗고, 가을엔 누렇고, 겨울엔 하얗고…”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논두렁을 걷는다는 건 계절을 걷는 일이야. 땅이 변하는 걸 발로 느끼는 거지.”

달삼은 말없이 흙먼지를 털어낸다.

“도시에서는 이런 길을 못 느껴요. 아스팔트엔 계절이 없잖아요.”

“논두렁엔 삶이 녹아 있어. 땀, 발자국, 잡초, 기다림, 나락… 모든 게 이 좁은 길을 오가며 완성되지.”

달삼은 가만히 말했다.

“스승님, 저도 누군가의 논두렁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눈에 띄진 않아도, 없어선 안 되는 그런 길처럼.”

스승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너는 이미 누군가의 삶을 지탱해주는 길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 작지만 끊어지면 안 되는 존재, 그게 진짜 의미 있는 자리거든.”




논두렁은 작고 조용하지만, 삶을 잇고 사람을 잇는 소중한 선이다.
달삼은 배웠다. 눈에 띄지 않아도, 누군가의 길이 되어주는 삶이 가장 단단하고 아름답다는 걸.
그날 들녘의 바람과 흙 내음을 품고 걷던 그 길 위에서 그는 다짐했다.
나도 누군가의 논두렁이 되어, 그 삶을 무너지지 않게 지켜주겠노라고.

'말의 온도와 삶의 결 > 스승과 제자의 대화 - 실체의 추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트랜지스터 라디오  (0) 2025.05.31
멍석  (0) 2025.05.31
새참  (1) 2025.05.31
등잔불  (0) 2025.04.14
검정고무신  (0) 2025.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