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룽지
누룽지는 밥을 다 짓고 난 뒤, 가마솥 바닥에 눌어붙은 흔적이다. 본래는 남겨진 자리지만, 물을 부어 다시 끓이면 고소한 향과 따뜻한 국물이 된다. 그래서 누룽지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타지 않고 남는 것, 버티고 눌러앉은 것—그것이 삶의 내면을 더 단단히 만든다. 누룽지는 인생에서 한 번쯤은 눌려본 이들에게 주는 고요한 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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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장작불에 밥을 짓고 난 뒤
스승은 조심스레 가마솥을 긁어 누룽지를 덜어냈다.
달삼은 구수한 냄새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스승님, 전 누룽지 냄새만 맡아도 어릴 적 생각이 나요. 겨울날, 이거 부숴서 끓여 먹으면 그렇게 따뜻했거든요.”
스승은 그릇에 물을 붓고 다시 불에 올리며 말했다.
“누룽지는 밥보다 더 깊은 맛이 있지. 얇고 바삭하지만, 그 안엔 불의 시간과 인내가 녹아 있어.”
달삼은 부글부글 끓는 냄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보리밥이 정직한 밥이라면, 누룽지는 견딘 밥 같아요. 눌려서 만들어진 거니까요.”
“맞아. 누룽지는 가마솥의 끝에서 태어나는 거야. 가장 오래 열기를 머금은 자리, 쉽게 떠나지 않고 남은 쌀들이 만든 맛이지.”
달삼은 말없이 누룽지 물을 한 숟갈 들이켰다.
입안 가득 퍼지는 구수함에, 눈을 감았다.
“스승님… 이 맛은 그냥 맛이 아니라 기억이에요. 어릴 적 할머니가 부엌에서 부르던 소리, 그런 것까지 같이 떠올라요.”
“그게 누룽지의 힘이지. 단지 음식이 아니라 시간의 잔향. 눌린 자리에서 태어났지만, 끝내 따뜻함이 되어 돌아오지.”
달삼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사람도 그렇겠죠. 인생에서 가장 눌렸던 시간들이 오히려 나중에 제일 따뜻한 사람이 되게 해주는…”
스승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견딘 시간은 절대 헛되지 않아. 눌리고, 버려졌던 순간들이 결국 누룽지처럼 가장 깊은 맛을 남기는 법이지.”
□
누룽지는 말없이 모든 것을 견딘 자리에서 만들어진다.
달삼은 배웠다. 눌렸다고 다 끝난 게 아니고, 타지 않게 버텨낸 자리엔 반드시 깊은 향이 남는다는 걸.
그리고 사람의 마음도 누룽지처럼, 가장 낮고 조용한 자리에서 진짜 따뜻함이 태어난다는 걸.
그날의 누룽지는 단지 음식이 아니라, 달삼의 오래된 시간까지 데워주는 고요한 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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