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의 온도와 삶의 결/스승과 제자의 대화 - 실체의 추상화

트랜지스터 라디오

by cheonglam 2025. 5. 31.
트랜지스터 라디오

트랜지스터 라디오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작지만, 그 안엔 온 세상이 들어 있었다.
먼 고장의 소식, 누구의 사연, 누군가의 노래까지 조용한 골방에 흘러들었다.
귀를 가까이 대고 볼륨을 조절하던 그 손끝엔 설렘이 있었다.
세상을 먼저 보지 않아도, 듣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시간.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고요한 공간에 온기를 전해준 다정한 동행이었다.


■□

늦은 저녁, 창문을 닫고 스승은 낡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꺼냈다.

달삼은 놀라며 말했다.

“이게 아직도 작동돼요? 정말 오래됐네요.”

스승은 미소 지으며 전원을 켰다.
지지직 소리와 함께 작은 볼륨으로 음악이 흘러나왔다.
낡은 톤의 성우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이 방송을 듣고 계신 분이 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달삼은 잠시 말을 잊고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스승님, 이 소리는 어쩐지 마음 깊숙이 들어와요. 화면도 없고, 자극도 없는데… 훨씬 따뜻해요.”

“라디오는 보여주지 않아서 더 집중하게 만들지. 보이지 않으니까 더 상상하고, 더 깊이 듣게 되는 거야.”

달삼은 조용히 말했다.

“요즘은 다 보이고 다 말하지만, 정작 마음은 잘 안 들려요.”

스승은 주파수를 조금 돌리며 말했다.

“라디오는 연결의 기술이야. 안테나를 세우고, 조심스레 맞춰야 소리가 들려. 사람 사이도 그래. 아무 채널에 맞춰놓고선 서로 들리지 않는다고 해선 안 되지.”

달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작지만 정직해요. 가까이 가지 않으면 안 들리고, 조용히 귀 기울여야만 함께할 수 있어요.”

“그래서 좋은 거지. 시끄럽게 다가오는 것보다, 조용히 곁을 지키는 소리 하나가 오히려 마음을 더 흔들 수 있어.”

방 안은 작지만, 라디오 소리로 가득 찼다.
뉴스, 음악, 사연, 그리고 침묵 속의 공감까지.
달삼은 말했다.
“스승님, 저는 누군가에게 그런 라디오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요. 눈에 띄진 않지만, 조용히 곁을 채워주는…”

스승은 라디오를 끄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 바람이면 충분하다. 너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조용한 밤을 덜 외롭게 해줄 수 있다면, 그건 세상 어떤 소리보다 크지.”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작지만 깊었다.
달삼은 배웠다. 보여주지 않아도, 들려주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걸.
그날 밤, 작은 스피커에서 흐르던 목소리는 달삼의 마음 속 어딘가를 조용히 울렸다.
말 없이도 곁이 되어주는 소리 하나,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말의 온도와 삶의 결 > 스승과 제자의 대화 - 실체의 추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필로그_Epilogue  (0) 2025.05.31
지게  (0) 2025.05.31
멍석  (0) 2025.05.31
논두렁  (0) 2025.05.31
새참  (1) 2025.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