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풍경은 바람 없이는 소리를 낼 수 없다. 누군가 힘을 주지 않아도, 그저 흐르는 공기만으로 울려 퍼지는 맑은 소리. 그래서 풍경소리는 강요 없이, 조용히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바람이 닿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울리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감정에 따라 다른 음을 낸다. 풍경은 말하지 않지만, 누구보다 먼저 계절을 알리고 마음을 흔든다.
■□
초여름의 오후, 달삼은 처마 끝에 달린 작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은색의 작은 종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청아한 소리가 났다.
“스승님, 이 풍경소리는 이상하게 마음을 가라앉게 해요. 특별히 멋진 멜로디도 아닌데…”
스승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말했다.
“풍경은 작지만 깊은 소리를 내지. 누구에게 들려주려고 울리는 게 아니라, 그저 바람이 닿는 만큼 울릴 뿐이야. 그래서 사람의 마음에 더 잘 스며드는 거야.”
달삼은 풍경 아래에 달린 작은 종이를 손끝으로 가볍게 만졌다.
“이 조각이 바람을 잡고 흔드는 거겠죠? 조용했던 공간이 이 소리 하나로 달라졌어요.”
“맞아. 풍경은 존재 자체로 소리를 내지 않아. 바람이 없으면 조용하지. 하지만 그 침묵도 소리만큼 소중하지. 필요한 순간에만 말하는 것, 그게 풍경의 미덕이지.”
달삼은 눈을 감고 풍경소리를 들었다.
불쑥 떠오른 건, 어린 시절 외할머니 댁의 풍경이었다.
“예전엔 이 소리를 시끄럽다고 느낀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기다려지는 소리예요.”
스승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삶이 복잡해질수록 단순한 소리가 그리워지지. 풍경은 간결한 울림으로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주거든.”
잠시 침묵이 흘렀고, 풍경은 두어 번 가볍게 울렸다.
달삼은 말했다.
“스승님, 사람도 풍경처럼 바람을 따라 울 수 있을까요? 누가 밀지 않아도, 스스로 울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선 비워야 해. 풍경은 속이 텅 비었기에 바람이 들어가 울릴 수 있잖니. 사람도 속이 꽉 차 있으면 아무 소리도 못 내.”
달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울림을 주는 사람… 풍경 같은 사람, 멋져요.”
“진짜로 마음을 움직이는 건 큰 소리가 아니야. 작지만 맑고, 잔잔하지만 오래 남는 소리. 그건 늘 바람처럼 조용히 다가오는 거지.”
햇빛이 기울고, 풍경소리가 조금씩 길어졌다. 달삼은 그 울림을 따라 마음을 정리했다.
“스승님, 이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네요. 반복되는데도 새로워요.”
“그건 풍경이 바람에 맞춰 소리를 바꾸기 때문이야.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양이지만 절대 같은 소리를 내지 않지. 사람도 그래야 해. 상황에 따라 마음을 조율할 줄 아는 것, 그게 지혜지.”
달삼은 처마 끝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젠 조용한 날보다, 바람 부는 날이 기다려질지도 모르겠어요.”
스승은 미소 지었다.
“그래, 흔들려야 울릴 수 있는 것이니까.”
□
풍경은 작은 바람에도 스스로를 흔들어 울림을 낸다. 강하지 않지만 깊고, 짧지만 오래 남는다.
달삼은 배웠다. 세상에 울림을 주는 방식은 반드시 커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가만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때때로 바람 따라 흔들리고 울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의 조용한 하루에 작은 풍경소리 하나로 기억되길 바랐다.
소리 없이 도착한 위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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