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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세상 다른 시선

낡은 나무의자

by cheonglam 2025. 4. 8.
낡은 나무의자

낡은 나무의자



낡은 나무의자는 말이 없었다.

다만 모든 계절과 몸짓을 받아내며

조용히 그 자리를 지켜냈다.

달삼은 배웠다.

반짝이지 않아도, 흔들려도 괜찮다고.

중요한 건 오래도록 앉을 수 있는 마음이라는 걸.

언젠가 누군가 지친 걸음을 멈출 때,

조용히 내어줄 자리를 품은 사람이 되길 바랐다.




■ 스승과 달삼의 대화

달삼은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 삐걱대는 나무의자에 앉았다.

물기 먹은 나무결, 군데군데 벗겨진 페인트, 앉을수록 익숙해지는 굽은 등받이.

“스승님, 이 의자는 낡았지만… 이상하게 편해요. 처음부터 내 자리였던 것처럼요.”

스승은 그 옆에 천천히 걸터앉으며 말했다.

“오래 앉은 자리는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 만든 자리야. 낡았다는 건 무너졌다는 뜻이 아니라, 많은 이야기를 담았다는 뜻이지.”

나무의자는 처음부터 낡지 않았다.

누군가 정성스레 다듬고, 반듯하게 못질하고, 햇살 좋은 날 마당 한켠에 가져다 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엔 시간이 앉았다. 사람보다 먼저, 혹은 사람과 함께.

“스승님, 저 나무결이 손바닥에 닿는 느낌이 참 좋습니다. 매끈하진 않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놓여요.”

“그건 그 의자가 많은 손과 등을 받아주었기 때문이지. 새 의자는 깨끗하긴 하지만, 마음이 앉을 자리는 아직 없거든.”

달삼은 등을 기대며 삐걱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치 의자도 숨을 쉬는 듯, 작게 울리고 있었다.

“삐걱이는 소리도 듣다 보면 좋네요. 살아 있다는 증거 같기도 하고.”

“그래. 사람도 그래. 조용히 있던 이가 어느 날 삐걱 소리를 내면, 그건 부러진 게 아니라 살아 있다는 신호야.

낡은 의자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이들의 작고 큰 몸짓은 귀 기울여 들어야 해.”

달삼은 나무의자 아래 자란 이끼를 바라보았다.

해마다 그 아래 자란 풀을 누르고, 또 누르며 자리를 내어준 흔적.

“스승님, 이 의자는 아마… 누가 먼저 와도 내쫓지 않았을 것 같아요.”

“맞아. 좋은 의자는 오래된 의자야. 기다리는 걸 안다는 건, 누구든 받아줄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이거든.

오래된 나무의자는 기다림의 상징이지.”

그늘 아래 앉은 두 사람은 말없이 시간을 나눴다.

“이 자리에 앉으면 괜히 말을 아끼게 돼요.”

“그건 네가 자리를 존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야. 오래된 자리엔 먼저 살아낸 침묵이 있거든. 거기선 말보다 숨이 먼저 익지.”

의자는 누군가 앉기 위해 존재하지만, 아무도 앉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의자가 자리를 지켜주는 것인지, 자리가 의자를 지켜주는 것인지 달삼은 문득 헷갈렸다.

“스승님, 언젠가 저도… 누군가에게 이런 의자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스승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너는 이미 그런 자리를 배우고 있는 거야.”




■ 청람 김왕식 문학평론

『낡은 나무의자』는 단순한 사물의 묘사를 넘어, 존재의 의미와 기다림의 본질을 성찰하는 산문시다.

청람은 나무의자를 단순히 오래된 가구로 보지 않고, 사람의 마음과 닮은 상징으로 확장한다.

햇빛과 비를 고스란히 견디고, 수많은 등을 묵묵히 받아낸 ‘의자’는 결국 세월과 사랑을 담은 존재로 재탄생한다.

작품 속 대화는 나무의자라는 매개를 통해 제자와 스승 간의 삶의 태도, 존재의 의미, 그리고 기다림의 미학을 드러낸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살아 있음의 증거가 되는 장면은, 외면당하던 것들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장면이다.

의자는 단순히 앉는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의 쉼을 받아줄 수 있는 마음’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특히 마지막 시구에서는 고요하게 응축된 바람 같은 여운이 있다.

“나는 언젠가 누군가의 쉼이 되는 의자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선언은,

우리 모두가 결국 누군가의 쉼터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다.

이 작품은 말보다 오래된 위로, 침묵 속에 깃든 사랑, 그리고 ‘기다림의 온도’에 대한 깊은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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