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길
들길은 누군가 먼저 걸어갔기에 생긴 길이다.
정식으로 닦이지 않았지만, 가장 사람다운 길.
흙과 바람, 들풀과 햇살이 함께 만들어낸 그 길엔 꾸밈이 없다.
발자국 하나에도 하루가 묻고, 고요한 풍경 속에도 숨결이 흐른다.
들길을 걷는다는 건 삶의 가장 자연스러운 리듬에 자신을 맡기는 일이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생각하게 만드는 길.
■□
햇살이 들판을 가득 덮은 오후, 스승과 달삼은 좁은 들길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
양옆엔 키 작은 풀들이 흔들렸고, 발밑에선 흙먼지가 조용히 일었다.
“스승님, 이런 길은 지도에도 안 나와요. 그런데도 마음은 더 편해져요.”
스승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들길의 힘이지. 누가 일부러 만든 게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 지나간 자리에 자연스럽게 생긴 길. 그래서 더 믿음직한 거야.”
달삼은 발끝으로 작은 돌을 밀었다.
“그럼 이 길도 누군가 매일 걸어서 만들어진 걸까요?”
“그렇지. 들길은 반복된 걸음이 만든 흔적이야. 가장 인간적인 길. 빨리 가기 위한 길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길이지.”
풀벌레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고, 냄새는 흙처럼 진했다.
달삼은 허리를 굽혀 들풀 하나를 꺾었다.
“스승님, 요즘은 다 포장도로라 이런 흙길을 걸을 일이 별로 없어요.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편리하긴 하지. 하지만 편리한 길엔 기억이 남기 힘들지. 들길은 발이 아니라 마음으로 걷는 길이야.”
달삼은 갑자기 멈춰 섰다.
“스승님, 이 길 끝엔 뭐가 있을까요?”
스승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들길은 끝을 위한 길이 아니라, 걷는 동안의 시간이 목적이니까.”
달삼은 걸음을 다시 떼며 말했다.
“그럼 이 길을 걷는 우리도, 어떤 목적지보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거겠네요.”
“맞아. 삶도 그런 거야. 어딘가에 닿는 것도 의미 있지만, 누구와 어떻게 걷느냐가 더 중요하지.”
햇살은 점점 기울고, 들길의 그림자도 길어졌다.
바람이 불자 들풀들이 한 방향으로 몸을 기울였다.
“스승님, 들길을 걷다 보니, 마음이 천천히 정리돼요. 시끄러운 생각도 사라지고요.”
“그건 들길이 사람을 닮아서 그래.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굽어 있어도 끝내 길이 되는 거니까.”
달삼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새들이 느릿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
들길은 누구나 걸을 수 있지만, 누구나 기억하는 길은 아니다.
달삼은 배웠다. 누군가의 발자국이 삶의 지도가 될 수 있다는 걸.
곁에 있는 이와 함께 걸으며, 흙먼지 속에서 마음이 투명해진다는 걸.
그날 들길을 걸으며 들은 가장 큰 가르침은 이 한마디였다.
“급히 가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 이 순간, 함께 걷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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